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라곤의 카탈리나 (문단 편집) === 이혼 === 하지만 세월이 지나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적어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반하면서 캐서린은 헨리 8세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헨리가 젊고 매력적인 앤에게 푹 빠져 있기도 했지만, 당시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이제서야--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에 오래도록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나에게 아들이 안 생기는 것은,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튜더 왕가 이전의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조]]의 계승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자신에게 적법한 남자 후계자가 안 생기면 자신의 사후에 튜더 왕가가 왕위를 찬탈 당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즉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해서 자기 대에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미혼으로 살다 죽은 후로 왕위 계승자가 없어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졌으니, 이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관점에 따라서는 뒤늦게 죄책감을 느껴 이혼 및 재혼까지 했는데도 후사 단절을 막지 못한 것(...).] 그래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형수와 결혼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게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하던 찰나에 그 유명한 [[앤 불린]]이 등장한 것이다. 그 시대 전통적인 여성상인 캐서린과는 전혀 다르게, 발랄하고 세련되고 신선한 매력으로 무장한 [[앤 불린]]은 머리까지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왕궁에서 유학한 경험으로 외국어와 화술, 매너에 능통했으며 다른 여자들처럼 [[로얄 미스트리스|왕의 정부]]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헨리 8세에게 정식 결혼을 요구하며 육체관계를 피했던 것이다. 앤 불린은 자신에게 몸이 달아 있는 헨리에게 결혼하면 원하던 대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유혹하면서, 끊임없이 '왕자를 낳아드릴 수 있으니 왕비로 삼아달라.'고 말하며 일개 정부가 아닌 정식으로 결혼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왕비로 책봉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몇 가지 경우에 '혼인무효'는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하기로 결정한다. 캐서린이 원래 자신의 형인 아서의 아내였다는 점,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구절을[* <[[레위기]]> 20 : 21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자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 --[[형사취수제|고구려 사람들은?]]--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헨리 8세의 [[고해성사|고해]]를 듣고 이 구절을 말해준 [[신부(종교)|신부]]가 '[[메리 1세|자녀 분]]이 계시잖습니까?'라고 하자 심각하게 '아들은 없소.'라고 받아친다. ~~딸은 자식도 아니냐?~~]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교황]]에게 혼인무효를 청구했다. 그러나 교황은 당시 위세가 높았던 에스파냐와 [[신성로마제국]]의 압력[*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왕이었던 [[카를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다.] 때문에 이를 기각했다.[* 이 역시 《[[성경]]》이 인용되는데, <[[신명기]]> 25 : 5에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 형제를 남편으로 들여야 한다'''는 역연혼의 구절이 반대파의 근거였다.]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 아들이 없다고 조강지처를 몰아낸대서야 어디 말이 되는고? 아들 딸 구별 말고 건강하게 잘 키우자는 표어도 모르는가?[* 그러나 이건 출산율을 떨어뜨려야 할 필요성에나 통하는 거였지, 실제로는 먹고살기 위해 노동력이 절실했던 평민이나, 왕위 or 영지가 남의 가문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딸보다는 아들이 더 필요했던 당대의 왕족 및 귀족들에게는 안 먹히는 구호였다. 당장에 헨리 8세도 그토록 아들을 갈구했건만, 얻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이후 헨리 8세의 딸들인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거친 뒤 [[튜더 왕조]]의 대는 끊겨,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에게 넘어갔다. 당연히 이 표어가 나온 것은 개그성으로, 이 만화가 소년지에 연재되던 시기는 산아제한을 권장하던 [[1980년대]]였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개그였던 것.] '''더구나 [[가톨릭]]은 이혼을 금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뻔뻔하게 그런 신청을 해?!'''[* 더욱이 [[클레멘스 7세]]는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사건을 겪은 지 6년밖에 안 되었다. 교리상 이혼이 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카를 5세가 무서워서라도 반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원복이 감수한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에도 "교리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스페인 제국|레이노 디 에스파냐]] 국왕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고 쓰여있다. 여기에 에스파냐 국왕이 하는 말 '''"너 이혼하면 왕 다한 줄 알아라!"'''] >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 뭐야? 내 딸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로마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 이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라! >---- >'''《[[먼나라 이웃나라]] - 영국편》'''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교황과 에스파냐 국왕의 대사 다만 이 발언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흔히 있는 고증오류 중 하나로 [[페르난도 2세]]는 이미 고인이었고, 당시의 스페인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는 [[카를 5세]]였다. 따라서 카를 5세가 "죄 없는 우리 이모를 몰아내려 한다고??"고 말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게다가 애초에 페르난도 2세는 [[교황]]을 압박할 정도의 힘이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내인 [[이사벨 1세]]와 함께 동군연합의 군주이기는 했지만 본인은 아라곤의 왕,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아라곤이 카스티야보다 여러모로 뒤처져서 아내에게 눌리는 편이었다.[* 전근대 유럽에서 부부의 초상화는 보통 남편이 크고 아내가 작게 그려지는데, 이사벨 1세나 페르난도 2세나 같은 군주였기 때문에 둘은 초상화는 동등한 크기로 그려졌다. 게다가 이사벨은 나이마저 페르난도보다 [[연상연하|연상]]이고, 부계상으로도 이사벨이 6촌 누나이었기 때문에, 항상 남편에게 자신이 [[여왕]]이고 연상임을 주지시켰다고 한다.] 차라리 이사벨 1세가 저 말을 했다면 모를까 페르난도 2세는 그럴 말할 처지가 못 되었다.[* 페르난도 2세의 발언권 부족에 대해서 신대륙에서 오는 수익을 카스티야에서 꿀꺽해서 아라곤이 위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는데, 헛소리다. 이사벨 여왕의 시대를 한참 지나, 펠리페 2세의 시기에도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오는 이익이 적어서 전비는 죄다 스페인 왕국에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아라곤은 금융업과 해운업, 조선업이 발달해서 스페인 동군 연합 왕국의 신항로 개척 사업에 자금과 선원, 기술력을 제공했다. 스페인의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탐험은 양대 왕국의 공동 사업이었지, 카스티야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왕의 치세에 아라곤은 신항로 개척의 악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연도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캐서린의 부모님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둘 다 이혼 공방 당시 이미 승하한 상태라서,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이혼 및 폐위 위협에 든든한 보호막 없이 맞서야 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